Jueun Bona Lee

여전히 자유롭지 않아

마드리드로 삶의 베이스를 옮긴 지 오늘로 1514일, 해외살이 5년차가 되었다. 25년을 살아온 고향을 단숨에 훌쩍 떠나 선택한 이방인의 삶. 행복한가? 하루의 행복지수 같은 걸 숫자로 매길 수 있다면, 그래서 지난 1514일의 평균값을 내본다면 '대체로 그렇다'에 동그라미 표시를 할 수 있겠다. 이곳에서의 삶에 꽤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진실로 깨닫게 된 것은 이십대 초반 내내 헤어나오지 못했던 ‘연말 증후군’을 어느새 극복했을 때였다.

화려한 조명이 번쩍이는 거리와 온갖 공간을 한가득 채우는 캐롤. 알싸해진 코끝과 빨개진 귀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늦은 밤까지 큰 소리로 깔깔대는 사람들. 나는 이 모든 것들에 진절머리가 난 유일한 사람 같았다. 모든 약속을 피해 이불 속에 웅크린 채로 그저 스윽 스윽 스마트폰 화면을 스크롤해본다. 색색의 일정들로 빼곡한 캘린더와 늘 '용량부족' 상태인 갤러리 같은 것들을 멍하니 넘겨보면서 끝없는 우울에 빠져든다. 대학생이 되고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그랬다. 이렇게 또 일 년 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내가 제대로 해낸 건 하나도 없고, 나와 내 상황은 여전히 그대로고, 내년이라고 과연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 나의 '연말 증후군'이라는 건 과연 그것들이 얼마만큼 진실인지 따져볼 겨를도 없이, 이미 침울해진 그 얼굴로 몸과 마음을 뒤덮은 무기력을 가만히 견뎌내는 일이었다.

어쨌든 이 곳에 온지 두 해만에 나는 이 지긋지긋한 ‘연말 증후군’이 없어졌다는 걸 깨닫게 된다. 여기에서는, 그러니까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삼시세끼 밥만 잘 챙겨 먹어도, 겨우 눈인사만 나누던 마트 계산원에게 "그라시아스(고마워)" 한 마디를 건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아주 대단한 성과가 되는 삶을 뜻했으니까. 나는 매일 매일 아주 조그마한 훌륭한 일들을 해냈다. 자랑할 데가 없어도 되었다. 그 조그마한 것들이 마음을 가득 가득 채웠다.

그런데 행복을 좇아 이 곳에 왔던가? 한국에서의 나는 그렇다면 불행했었나? 삶의 거의 모든 면면이 완전히 변화하게 될 어마무시한 결정을 눈앞에 두고도 미처 몰랐던 스물다섯, '가야해'라는 직감이 몸과 마음을 온통 휩싸고 있었던 그 때로부터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더라? 어쩐지 늘 자유롭고 싶었던 것 같은데. 자유로워지고 싶어. 훌훌 날고 싶어. 거리낌 없이 살고 싶어. 엄마가 꾼 태몽 속 크고 예쁜 새처럼.

졸업반이 되었을 무렵 내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공기업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찌나 큰 유행이었던지 다른 선지는 거의 없어보이는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걸 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직 뭔지는 몰라도 나는 다른 일이 하고 싶어. 수능을 보고 대학생이 되고 졸업할 때가 되니 어딘가에 속하기 위해 또 다른 시험을 준비하고... 난 못할 것 같아. 발을 디딜 자신조차 없었다. 착실하게 길을 따라 걷는 친구들을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다른 길은 정말 없을까 두리번거렸다. 남들이 도망이라고 불러도 괜찮았다. 실제로 도망치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렇다면 또 물어봐야 한다. 지금 더 자유로워졌는가? 놀랍게도 잘 모르겠다. 세상에는 당신을 자유롭지 않게 만드는 것이 당신이 지금 상상해 볼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많다.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만한 딸, 괜찮은 직장과 비슷한 배경을 가진 누군가와 꾸린 정상가족, 지인의 결혼식에 들고 갈 명품 가방 두어 개와 일 년에 한 번쯤 떠나는 해외여행. 스물다섯의 눈에 갑갑했던 그 모든 것들로부터의 도망은 유의미했다. 지금의 나에게 그 모든 것들은 정말이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대신 이 곳에서 나는 거대한 프레임을 뒤집어쓰고 있다. 내 이름은 '아시아 여자애'다.

우리 아파트에 사는, 우리 오피스에 있는, 우리 가게에 자주 들르는 (대부분 유일한) 아시아 여자애. 아직 스페인어를 잘 못하고 그 때문인지 보통 의사표현을 거의 하지 않고 대부분 싱긋 웃는 얼굴로 "괜찮아"라고 말하는 아시아 여자애. 글쓰기를 좋아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세 번 완주했고... 그런 것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실제로 물어본 적도 없음) 그냥 그 아시아 여자애. 어디서 온지도 모를 이 막연한 기대값을 자연스레 흡수한 내가 있다. 아니, 나는 없고 그 아시아 여자애가 여기 있다.

예상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사실을 안다. 무표정한 얼굴로 차갑게 말하는 아시아 여자애, 수그러든 모양새 없이 단조로운 말투로 따박따박 따지는 아시아 여자애, 싫다고 말하는 아시아 여자애는 보통 예상하는 일 목록에 존재하지 않기 마련이다. 이질감과 불쾌감은 반발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새로운 사회에 들어가 일종의 자기 자리를 찾아보려는 이방인에게 반발감이라는 건 그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생존과 직결된 무서움이다. 그리하여 이 프레임이라는 것이 급기야 속박이나 구속의 단계를 넘어서 나를 '지워내고' 있는 상황에서도 쉽게 훌훌 벗어던지지 못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자유로워 보겠다고 10,000km를 건너 왔는데 더한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니, 이거 뭔가 한참 잘못된 거 아닐까 생각할 때 즈음 깨닫게 된다. 내가 선택한 이 이방인의 삶은 사실상 이제 겨우 막 시작된 것이구나. 이놈의 '아시아 여자애'라는 꼬리표를 벗어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단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보다는 '잘 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진 시점부터였다. 아파트 계단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랫집 할아버지에게 오늘 셔츠가 멋지다고 말을 건넬 수 있게 되었고, 비싼 요금제를 권유하는 통신사의 전화를 거절하는 여유가 생겼으며, 어렵게 입사한 현지 회사에서 근속 2년을 채우고 퇴사를 준비하고 있는 오늘에서야.

나에게 귀 기울이며 나의 의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어디에서도 쉬운 일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써 나가는 인생이 '짜잔'하고 줄 것만 같은 자유는 일종의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자유롭다고는 쉽게 말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괜찮다. 다음 장으로 또 한 발 나아갈 용기는 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