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미니멀리즘 문학 그리고 앤디 위어의 '바로 그 단편'
작은배의 온라인 모임 < 번역 없이 공부하기 > 3기에 참여하며 작성한 글입니다.
작은배의 온라인 모임 < 번역 없이 공부하기 > 3기가 시작되었다(일명 '번공모' 모임에 대해 더 궁금하다면 이 링크에서 3기 모집글을 읽어볼 수 있다). 지난 7월에 진행되었던 2기에 이은 두 번째 참여다. 사실 2기 참여를 결정하는 일은 수월했다. 번공모의 존재는 1기 모집 때부터 알고 있었고 이미 소개글만으로도 어느 정도 매료된 상황이었으며 당시 회사에도 노티스를 내둔 상태라 일과중 점심시간 근처에 시간을 유연하게 사용하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으니까. 3기가 진행되는 9월은 상황이 좀 달라진 편이었다. 석사과정이 막 시작되어 오후 3시부터 9시까지 내리 이어지는 빡빡한 강의 앞에 번공모 세션을 더해야 하는 일정인 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주차에는 시험도 예정되어 있었다. 지난 2기를 비추어 보았을 때 매주 세션을 위해서 읽고 공부하는 시간도 꽤 필요할 텐데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보기로 결정한 것은 번공모가 내가 지향하는 '공부'의 형태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특히 대학을 졸업할 즈음부터는 어쩐지 마음 한 켠에 줄곧 공부를 '해야 한다' 또는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왔던 것 같다. 돌아보면 입시로 점철된 전형적인 한국의 교육제도 아래에서도 (운좋게) 이것이 진짜 공부로구나!하는 순전한 기쁨을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던 순간들이 꽤 많이 있었는데, 그것과 훌쩍 멀어져버리며 공허함과 답답함, 불안함 같은 것들이 스물스물 찾아왔던 것이다.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유일무이한 목표였건만 아이러니하게도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얻게 되자마자 '공부만 아니면 뭐든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환상에 홀랑 휩싸여 정반대로 치닫은 셈이니 이것 또한 오직 입시를 위해 달리는 의무교육제도의 부작용이라고 괜시리 우악대고 싶어진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삶의 저변을 넓히는 일. 알게 되면 눈에 귀에 피부에 걸리는 것들이 많아진다. 레이더의 해상도가 선명해지고 끌어올릴 그물의 모눈이 더 촘촘해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면 될까. 걸리는 것들이 많아지면 삶은 배로 다채로워진다. 실제로 보이는 것 너머가 보이기도 하고, 쉬이 드러나지 않는 아름다움(또는 더러움)을 잡아챌 능력이 생기기도 하며, 시공간을 가로지르며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는 근사한 순간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다만 유일한 진입장벽을 찾자면, 공부는 시간과 공을 들여서 차곡차곡 몸에 쌓아나가야 하는 일이라는 점 정도랄까. 번공모 2기에 참여하면서도 즐거움의 순간들을 자주 겪었다. 혼자 떠나온 여행지에서 참여했던 마지막 세션 다음날, 암스테르담 시립 미술관(스테델릭 미술관)에서 함께 다뤘던 에세이의 인물들-데이비드 워이너로비치(David Wojnarowicz)와 그의 연인이자 멘토였던 피터 휴아르(Peter Hujar)-의 사진을 발견했을 때, 2주 전 그 에세이를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사진들에 대해서 그 어떤 생각도 느낌도 없이 지나쳤을 거라는 걸 알았을 때, 그 짜릿함은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2기 때보다는 아무래도 시간의 제약이 많은 9월이지만, 가능한 한 열심히 읽으며 또 한 번도 고개를 내밀어 본 적 없는 미국 단편소설의 세계를 즐겁게 맛보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사실 생각해보면 영어로 된 문학작품을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언제인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근 몇 년 간 나에게 읽고 쓰는 영어란 회사에서 주고받은 문서와 메세지, 특정 주제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기 위한 자료,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에세이나 신문기사, 매거진 아티클 정도였고, 문학작품이라면 아마도 학부 3-4학년 즈음 (졸업을 위해 약간은 마지못해 부전공 과목으로 결정했던) 영어영문학 수업에서 다룬 일부 외에는 마땅히 기억에 남는 것이 거의 없으니까. 문장과 표현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에는 내 영어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또 필요 너머에 있는 글들을 영어로 읽는 것은 곧내 피로한 것으로만 느꼈던 것이 아마 가장 큰 원인이지 싶다. 그래서 문학의 힘이 필요할 때는 오직 늘 우리말로 된 책들을 찾았는데... 과연 한 달 동안 나는 이 인식을 깨고 나올 수 있을지 기대되는 마음도 있다.
3기 첫 세션에서는 맛보기로 짧은 두 편의 단편소설을 읽었다.
In A Tub, Amy Hempel(에이미 헴펠)
A4용지 한 면을 미처 다 채우지 못하는 매우 짧은 단편소설이다. 이런 초단편을 'short-short story'라고 부른다고 한다. 글 전체의 길이만 짧은 것이 아니라 특별한 비유 같은 것을 덧붙이지 않은 간결한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섬세하게 설정되었을 일부 장면들을 매우 절제해서 묘사하는 데에서 그친다. 플롯을 갖춘 사건도 없으니 휘리릭 읽고 나면 '엥?' 소리가 절로 나온다.
20세기 후반 미국의 현대 단편소설은 바로 이 '미니멀리즘'으로 특징된다. 대표적인 작가로 손꼽히는 것이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로 그는 몹시 평범하고 때로 추접하기까지 한 일상을 꾸밈 없이 간결하게 그려내는 '더티 리얼리즘(dirty realism)' 기법으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와 떼놓을 수 없는 인물로는 편집자인 고든 리시(Gordon Lish)를 꼽을 수 있는데 그는 카버의 초안을 아주 많이(모르는 사람의 눈으로 보아도 엄청 많이 편집했다. 처음 이 내용을 다룬 기사들은 대부분 유료로 해당 플랫폼을 구독해야 해서 읽어볼 수는 없었지만 이 블로그에서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편집해 세상에 내놓았는데 이 정도면 거의 편집자인 리시의 작품인 수준이라며 '출판에서 편집자의 역할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다. 여하튼 저널리스트로 일하던 에이미 햄펠 역시 이 편집자 고든 리시의 글쓰기 워크숍을 시작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함께 읽은 소설 < In a Tub >가 수록된 << Reasons to Live >>라는 책을 그에게 바치기도 했다고 한다.
소설에서는 꿈을 꾸는 것 같은 비슷한 이미지들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웅장한 높은 아치와 스테인드글라스로 색색의 빛이 아른거리는 교회의 텅 빈 고요함, 나비의 날개를 투과해 아름다운 색을 띄는 햇볕을 가만히 쬐고 있는 창가의 고양이, 한밤중 깜깜한 호수에 띄운 넓적한 콘크리트 믹싱 텁 안에 누워 적막함 사이를 둥둥 떠다니는 소녀. 이 환상적인 이미지들은 화장실의 하얀 백열구 아래 손톱을 빤히 쳐다보고서 문을 잠그고, 물을 가득 받은 욕조에 미끄러지듯 머리를 담그는 화자의 모습으로 끝난다. 사진으로 담아낸 것 마냥 그려지는 일련의 장면들과 소리 내어 읽어보면 운율감이 느껴지는 문체가 바로 이 글이 전달하고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한 공간들의 분위기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두어번쯤 소리 내어 읽었을 때 이 소설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고 이 미니멀리즘 스타일의 소설을 몇 편쯤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함께 읽은 것들
- Amy Hempel Is the Master of the Minimalist Short Story, Ruth Franklin, The Atlantic
- An Angry Flash of Gordon, Alexander Nazaryan, Newsweek
- 편집자가 절반 이상 뜯어 고친 ‘카버 소설’, 최재봉, 한겨레
The Egg, Andy Weir(앤디 위어)
두번째 글의 저자가 앤디 위어인 것을 알았을 때 미처 다 끝내지 못한 << 프로젝트 헤일메리 >>를 다시 꺼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아직 완독하지 못했음에도, 또 그마저도 원문이 아닌 한글번역본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이 글 < The Egg >와 같은 작가라는 게 명백하게 느껴졌다. 계속되는 대화로 이어지는 짧은 호흡의 문장들, 머릿속 생각들을 꺼내어 놓은 것 같은 독백체, 약간 뻘하게 웃기는 특유의 유머 같은 것들 때문이었다. 다만 << 프로젝트 헤일메리 >>에서는 정신이 혼란할(!) 정도로 과학적 서술이 자세한데 갑자기 여기서는 사후세계며 신이며 환생이라니... 얼핏 철학적인 우화에 가까운 이 소설이 같은 작가의 것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앤디 위어는 입자 가속기 물리학자였던 아버지와 전기기술자 어머니 사이에서(이제 이러면 << 프로젝트 헤일메리 >>의 많은 부분이 어쩐지 이해된다!) 자라며 어릴 적부터 SF 소설을 많이 접했다. 그 영향 때문인지 본업인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여가 시간에 개인 블로그에 글을 썼는데 이 짧은 단편소설 < The Egg >이 엄청난 바이럴이 되면서 많은 팬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블로그에 가보면 온갖 언어로도 번역된 것이 있다고 해서 찾아보았는데 실제로 거의 30개 번역본을 볼 수 있다. 이후에는 이곳에 (우리가 아는 동명의 영화 원작인) << 마션 >>을 한 챕터씩 써서 연재하게 된다. 그런데 위어가 글로 이렇게 떼돈을 벌게 될 줄 정말 상상도 못했었는지 많은 팬들이 전자책 단말기 킨들에 글을 담아서 보고 싶어하는 것을 알게 되자 0.99불이라는 최소 가격을 붙여 아마존에 판매하기도 했다고(단지 무료 배포가 되지 않아서였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라이언 고슬링이 주연을 맡은 << 프로젝트 헤일메리 >>의 영화 개봉을 손꼽아 기다리는 팬들이 수없이 많을만큼 엄청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소설에는 오직 두 사람만 나온다. 막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은 '너'를 주어로 삼은 2인칭 시점 소설인데 아주 사소해보이는 이 차이가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의 당사자가 된 것처럼 쉽게 몰입하게 하는 효과를 준다. 그리고 '너'와 이야기를 나누는 '나'는 사후세계에서 만난 신이다. 그런데 또 신이라고 하기에는.. 좀 너무 캐주얼하다. 그야말로 위엄도 권위도 느껴지지 않는데 그래서 어쩐지 편안하다고 느껴지기까지 하는 둘의 대화 속에서 윤회사상이나, 영혼이나, 내가 곧 타인이고 타인이 곧 나라는 이런 어려운 이야기가 나와도 거부감이 들지 않게 된다. 여러모로.. 독특하다. 결국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은 나의 또 다른 환생이다. 내가 누군가를 죽인다면 곧 나를 죽인 것이고,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어도 그것은 곧 나에게 친절을 베푼 것인 셈이다. 계속 계속 환생하면서 영혼은 성숙해지고 그 모든 일이 벌어지는 오직 나 한 사람을 위한 세계는 성숙을 위한 '계란', 즉 the egg이다. (자꾸 죽고 자꾸 태어나서 영혼이 커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내 영혼을 계란 안에서 커가는 병아리로 상상해보면 기분이 굉장히 묘해지는 것이다.)
"Every time you victimized someone," I said, "You were victimizing yourself. Every act of kindness you've done, you've done to yourself. Every happy and sad moment ever experienced by any human was, or will be, experienced by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