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eun Bona Lee

W4 | 공부를 안했지만 (다른) 공부를 했어요

얼레벌레 지나간 4주차.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지 않았는데.. 비효율과 집중 못함 콤보를 때려맞은 썩 만족스럽지 못한 한 주였다. 공부 안 한 걸 누굴 탓하겠냐만은 그래도 굳이 핑계를 찾아보자면.. 파트너가 오래 묵혀둔 휴가를 반강제로 몰아서 쓰게 되면서 심심한 누군가가 거실에서 계속 날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24/7 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어쩐지 신경 쓰여서 자꾸 방탈출 -> 같이 놀면 물론 나도 재밌음 -> 집 앞에 나가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면 이제 뭐 반나절 금방 날아감 -> 근데 너만 휴가지 나는 휴가가 아닌데요..(!) 심지어 이번주에 헬스장에 한 번도 안 갔다는 것을 깨닫고 파트너에게 (또는 스스로에게) 신신당부하고 있다. 10월 말은 중간고사 시즌이라는 것을.

화요일에는 작은배의 < 번역 없이 공부하기 > 3기 마지막 모임이 있었다. 사실 퇴사 일보직전이라 시간이 널널했던 2기 때와 상황이 달라져서 한 달 동안 화요일은 체력적으로 정말 힘에 부쳤다. 월요일에 밤을 새서 페이퍼 리뷰 과제를 겨우 제출하고, 3시부터 9시까지 이어지는 대학원 수업 앞에 2시간 가량의 번공모 모임을 붙이려고 하다보니 뇌가 실시간으로(!) 지치는 게 느껴졌다. 이른 점심을 먹고 늦은 시간까지 초콜릿이나 커피 같은 것에 기대어 아홉 시간을 내리 앉아 있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뭘 먹을 힘도 남아있지 않을만큼 진이 쏙 빠진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정말이지 참여한 것을 하나도 후회하지 않는 즐거운 모임이었다. 취향이나 결이 잘 맞고 내가 좋아하는 어떤 것들을 비슷한 양의 진지함을 가지고 대하는 사람들과 꾸준하게 만나 같은 것을 읽고 이야기 나누는 일은 그 자체로 그냥 아주 즐거운 일. 2기 마지막 모임을 마치고 들렀던 미술관에서 함께 읽은 에세이의 작가를 딱 마주쳤을 때처럼, 지난 주말에는 서점에서 미란다 줄라이의 신간이 눈에 쏙 들어왔다. 멋진 우연이 선물처럼 자꾸 찾아와주어서 꽤 행복했고.. 이제 또 이렇게 4기도 계속 하게 되겠지.. 언젠가 제주에 갈 일이 생겨서 강단 님을 직접 만나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그것도 정말 근사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문득 누굴 만난다고 하니 한동안 매주 금요일마다 한 시간씩 온갖 이야기를 나눴던 스튜어트도 떠오른다. 명목상 영어공부였지만 사실 철학/문학/사회학/정치학 그 어딘가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내가 어떻게 판단될 거라는 불안이나 걱정 없이 내 생각과 가치관을 담아 대화하고, 또 시공간을 가로지르며 이어지던 공통점들로 부연설명 같은 것 없이도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던, 다섯 달 동안 나에게 그 누구보다도 '친구'라고 불리워야 마땅한 사람이었으니까. 연말에 카드부터 한 통 써야겠다.

정말이지 한장 한장 재미있게 읽었던 빈센조 라트로니코의 < Perfection > 을 완독했고 (생각해보니 이 책도 스튜어트가 추천해준 책이다 엉엉), 한동안 삶의 긴장도를 높이는 모든 콘텐츠를 기피하면서 차일피일 미뤄왔던 넷플릭스 미니 시리즈 < 소년의 시간 > 을 이틀만에 엄청나게 몰입해서 정주행하고, 오늘은 영화관에 가서 폴 토마스 앤더슨의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를 보고 왔다. 셋 다 기록하고 싶은 부분들이 있었으니까 차차 해나가보기로 하고.. 이렇게 보니 정말 공부 빼고 다 한 것 같다(머쓱) 하지만 그래도, 아무래도, 읽고 듣고 보고 그리고 또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는 읽을거리를 찾아보고 어떤 것을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고 누군가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또 다른 면면에 대해서 스쳐가는 생각들을 잡아채고 종종 그것들을 보이는 곳에 또 볼 수 없는 곳에 문장으로 남기고, 그런 것들을 정말이지.. 내가 좋아하는 것 같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돌아보니 좋았던 거 말고, 겉멋과 치기로 한가득 부풀려져 있던 진짜인 듯 가짜인 듯 좋았던 거 말고. 그냥 나밖에 모르지만 머릿속에 찰칵 찰칵 소리를 내며 이어지는 체인들과 이렇게 세상을 두리번거리다 보면 자꾸만 나에게 중요해지는 것들 또 희미해져 가는 것들을 기민하게 바라보는 것. 또 쉽사리 납작해져 가는 것들 사이로 불어넣는 생기 같은 것. 그런 것들이 있어서 정말이지 삶이 썩 즐거운 요즘이다.

좋아. 다 좋으니까.. 다음주에는 공부를 열심히 하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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